인간세상에 태어난 이유
인간들이 살아가는 세상에는 많은 생명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다. 해충도 있고, 동물도 있도, 곤충도 있고, 인간도 있도, 귀신도 있고, 그중에 인간으로 태어난 이유는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해 보곤 하는 문제이다. 하지만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는 사람은 드물다. 그 이유는 태어난 이유를 찾다 보면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기기 때문이다.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은 아무리 생각한다 하더라도 적절한 답변을 찾기가 매우 난해하다. 나도 이 생각을 해본 적이 있고, 적절한 해답을 찾지는 못했다. 그런데 관점을 조금만 바꾸어서 보면 의외로 간단하게 풀린다. 인간이 다른 동물이나 해충과 다른 점은 생각이 무한하다는 점이다. 그리고 본능을 이겨 서고 억제하며 그 이상의 말이나, 행동으로 이어나갈 수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그 말은 즉 생존본능 이외에 생명을 보호하고 나에게 소유된 무언가를 나누고, 베풀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 것은 꼭 물질이 아이라 따듯한 분위기의 말이나 표정도 이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일생을 살아가면서 죄를 짓는 것 말고 그 반대로 지은 죄의 업장을 소멸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의미가 된다. 업장이란 무슨 일을 하면 반드시 생겨나는 인연, 관계를 말하는데, 육식동물이 자기 살자고 초식 동물을 사냥해서 먹으면 살생의 업이 쌓이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인간은 육식을 할지 초식을 할지 선택이 가능하니, 선택의 결과에 따라서 업을 쌓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반대로 쌓였던 업도 소멸 시키는 업장소멸도 가능하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인간세상에 태어났을 때 업장을 많이 소멸하고 가시라는 인사말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가는 방법
우선 업장을 소멸시키는 방법을 생각하기 전에 더 중요한 건 업을 그만 쌓는 것이다. 한 가지 업장을 소멸시켜도 10가지 죄를 다시 짓는 다면 무슨 도로아미타물일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어떻게 죄를 짓는지 먼저 알아야 한다. 10가지 악업, 십악업이라고 부른다. 이는 불교에서 힌트를 얻었다. 우선 입으로 짓는 4가지 악업, 이간질, 거짓말, 아무 말, 폭언 이렇게 4가지이다. 다른 것은 바로 이해가 되겠지만, 아무 말 이게 중요하다. 아무 의미 없는 말을 하는 것이 죄에 해당되니 주의해야 한다. 특히 남의 말, 남의 말을 옮기는 것은 악업을 쌓는 지름길이니 하지 않는 것이 좋다. 다음으로는 행위로 짓는 3가지 악업이다. 살생, 투도, 사음이다. 살생은 생명을 죽이는 것이고, 투도는 도둑질, 사음은 부적절한 사랑을 의미한다. 요즘세상에는 직적 접인 살생보다는 살생을 부추기는 식습관을 주의하는 것이 필요하다. 내가 육류를 선호하면 누군가는 계속 가축을 죽이 여한다는 말이다. 결국 간전적인 업이 쌓이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마음으로 쌓는 악업 3가지이다. 탐욕, 무지, 성냄이다. 무지는 없을 무에 알지자를 쓴 한자이다. 아는 것이 없다는 말이다. 이 말은 즉 배우지 않는다. 깨달음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공부를 하지 않고 정체되어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결국 무지는 죄이다. 인간은 살아 있는 동안은 끊임없이 배우고 깨달아야 한다는 말이다. 어린아이에게도 배울 것이 있다는 옛말이 괞히 있는 것이 나닌 모양이다.
죄를 소멸하며 살아가는 삶
10가지 악업을 반대하는 말은 10가지 선업이다. 불교의 언어를 빌리면 공덕을 쌓는 것을 의미한다. 죄를 소멸하며 살아가는 삶은 십선업을 실천하는 삶이 된다. 입으로 짓는 4가지 선업은 감사의 말, 칭찬의 말, 진실된 말, 침묵이다. 가끔 선의의 거짓말이 필요하지 않느냐 하는 의문이 들 수 있는데, 굳이 선업을 짓는 삶에 그게 또 옳고 그른지 분별이 드는 말을 해서 시시비를 만드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니 그냥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리고 4가지 악업들이 분주하게 일어나는 곳에서는 침묵을 지켜서 죄를 짓지 않는 지혜가 반드시 필요하다. 다음은 행위로 짓는 3가지 선업 생명보호, 나눔, 사랑이다. 행동을 함에 있어서는 이것이 생명을 보호하는 것인지, 내 것을 나누는 것인지, 사랑을 표현하고 베푸는 것인지 체크하고 행하면 된다. 그렇지 않은 일이라면 하지 않는 것이 현명ㅎ하다. 마지막으로 마음으로 행하는 3가지 선업이다. 보시하려는 마음, 배우고자 하는 마음, 내가 틀렸을 수도 있구나 살피는 마음이다. 보시는 베푸는 것을 의미한다. 말이던 행위이든 남이 필요한 것을 나누는 것이다. 배우고자 하는 마음은 적의를 업애주고 먼저 인사를 건네고 말은 건네는 용기를 만들어준다. 내가 틀렸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마음은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는 힘의 시작이다. 나 자신이 바뀔 수 있는 존재가 된다면, 그것은 물의 성질을 닮게 된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 다른 오염된 것과 섞인다고 불평하지 않으며, 높은 산도 품어버린다. 내가 물의 성질이 될 수 있다면, 어디서든 존재할 수 있도 무엇과도 섞일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이렇게 물 흐르듯이 살아가다 보면, 물에 뜨는 기름처럼, 하늘로 오르는 수증기처럼, 삶은 가벼워지게 되고, 인간의 삶이 끝나는 시점에는 무엇보다도 가벼운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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